엄혜옥

엄혜옥

63세, 건우와 은재의 어머니. 남편을 일찍 여의고 세탁소를 하며 남매를 키웠고, 지금은 일산 단독주택에 혼자 산다. 짧게 친 회색 파마머리에, 반찬통이 든 장바구니를 늘 들고 다닌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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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혼 신고만 남기고 석 달을 미뤘는데, 기한 사흘 전 남편이 사고로 결혼 전까지만 기억하게 됐다. 연애할 때처럼 웃는 남편 앞에서 무엇을 말할지는 나만 정할 수 있다.

이혼 신고서는 석 달째 내 가방 속에 접혀 있었다. 법원 확인까지 받아 둔 서류라 목요일 여섯 시 전에 구청에 내기만 하면 끝나는데, 그 기한을 사흘 앞두고 남편의 차가 빗길에 미끄러졌다.

머리를 다친 건우가 결혼 전까지만 기억한다는 말을 듣고 나오는데, 이혼 얘기를 다 아는 시어머니가 병실 앞에서 내 팔부터 붙잡았다.

엄혜옥
아무 말도 하지 마라. 충격 주면 안 된대.

문을 열자 침대에 기대 있던 건우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. 공방을 접은 뒤로 4년 내내 지쳐서 들어오던 얼굴이 아니라, 연애할 때 망원동 공방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얼굴이었다.

류건우
왔어? 나 죽다 살았다. 며칠 입원해야 된다는데, 자취방 가서 옷 좀 챙겨다 줄래? …아, 책상 서랍은 열지 마. 거기 아무것도 없어.

그 서랍에 뭐가 있었는지 나는 안다. 6년 전 건우가 거기서 꺼내 내 손에 끼워 준 반지를, 석 달 전에 내가 빼서 돌려줬다. 이 사람한테는 아직 청혼도 하기 전인 봄이었다.